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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일본 칼럼 내용입니다. 댓글은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일본 칼럼 기사 본문 >
「만화 왕국」 일본에게 닥쳐온 「한국산 만화 표현」의 열풍…『나 혼자만 레벨업한 건』 제작회사 일본 지사장이 말하는 일본 만화의 최신 사정
 
만화 애플리케이션 「픽코마」에서 No.1 히트를 하며 2020년에는 월 판매액이 1억 엔 이상이었던 『나 혼자만 레벨업한 건』 등의 웹툰을 제작하는 REDICE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의 일본 지사 레드세븐의 사장을 맡았으며, 『도굴왕』이나 『전지적인 독자의 시점에서』 등의 역시 인기 웹툰을 제작하는 엘세븐 창업자이기도 한 이현석 씨는 2000년 대에는 「영매거진」(고단샤)에서 만화 원작자로서 「영간간」(스퀘어 에닉스, 이하 스쿠에니)에서 편집자로서 활동한 경험이 있고, 22년 간에 걸쳐서 (현재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갑자기 한국의 만화가가 일본에서 인기를 독차지 하게 되었다든지, 웹툰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라는 해설이 일부에 있기는 하지만, 이현석 씨가 스쿠에니에 근무한 후에는 comico、DMM Teller를 거쳐 현재에 이른 것을 잘 살펴보는 것으로, 한국과 일본 만화계의 교류・교차의 역사와 어째서 지금 『나혼렙』이 일본에서 대히트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인기 웹툰을 차례로 선보이게 되기까지의 「이전 역사」, 2000년 대에 한국과 일본 만화계의 교류 역사를 이현석 씨와 「영간간」 창간에 종사하며, 당시 이 씨와 함께 일하고 있었던 스퀘어 에닉스 H 씨(현재는 스마트폰 용 게임 부문 시나리오 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에게 물었다.
 
 


 
■ 만화 기획자로서의 스승은 고단샤의 편집자 유리 코우이치
 
 
――이현석 씨가 일본에 오고 만화 업계에서 일하게 되기까지의 일들을 알려 주세요.
 
이현석 씨:  저는 1974년 생입니다. 한국에서는 1982년 창간한 「월간 보물섬」이라는 만화 전문잡지 등이 이미 있었지만, 88년에 「잡지에서 연재하고 단행본으로 만들어져 수익을 올린다」라는 일본의 만화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IQ 점프」가 창간되었고, 게다가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의 정규판이 게재되거나, 애니메이션 『에리어 88』의 TV 방영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중3 시절 「만화가가 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1995년에 병역으로 입대하고, 북한에서 온 잠입 공작원의 포위소탕작전이라는 실전을 갑자스럽게 경험했고, 97년에 제대한 후, 대학교 3학년에 만화 원작자로서 98년에 데뷔합니다.
 
90년 대에는 한국의 잡지 만화 전성시대였습니다. 1997년 말에 아시아 통화 위기가 있어, 한국 경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고 종신고용 신화가 붕괴되어, 각 회사가 정리 해고를 시작했습니다. 해고된 사람들이 간단히 창업할 수 있는 것으로써 만화방이 인기를 끌었고, 전성기에는 전국에 2만 점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유통하기 위한 만화가 대량으로 요청되었고, 그 파도를 탄 저는 원작자로서 얻은 수입으로 학비도 벌 수 있었고, 꿈이었던 만화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만화는 일본, 영화는 미국에서 오고 있다. 그 근본을 알고 싶다」 라는 마음이 부글부글 끌어올라, 일본에 갈지 미국에 갈지 고민한 끝에, 일본 유학을 결정합니다.
 
가장 처음에 살았던 곳이 니시카와구치입니다. 제가 생각한 일본의 이미지는 『시티헌터』에 나올 법한 80년대의 세련된 도쿄의 거리였지만, 그 환상은 한 순간에 부셔졌습니다.
 
――지금은 또 다릅니다만, 옛날에는 엄청났으니까요......(^^)
 
 
 
 
■ 일본에서도 만화 원작을 다루게 되다. 
 
 
이현석 씨: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일본에서 많은 작가님이나 편집자 인터뷰를 시작하여, 한국 잡지에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오! 나의 여신님』의 후지시마 코스케 씨를 취재하고 싶어서 고단샤 「애프터눈」 편집부에 전화를 했더니 「 뭔지 모르겠지만, 한 번 와봐」라는 답변을 듣고, 만나 뵀던 분이 당시의 편집장 유리 코우이치 씨입니다.
 
그 때는 마침 「점프」를 비롯한 만화 잡지 부수가 드디어 점점 상승하더니 성장이 멈춰, 하락 경향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첫마디가 「일본의 만화는 위기다, 망한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치도 않는, 예의에 어긋난 질문을 했지만요(쓴웃음). 얘기를 들어보니, 유리 씨가 담당한 작품은 『사랑과 진실』이나 데즈카 오사무의 『세 눈이 간다』, 이외에도 『AKIRA』나 『공각기동대』의 이름이 나왔고, 식은 땀을 흘렸습니다.
 
다만, 유리 씨가 그 후 (저를) 신경 써주셔서, 제가 대학원에 합격했을 때에는 술을   사주셨어요. 그 때 신주쿠 바에 함께 있던 「영간간」의 편집자가, 제가 원작을 작업하고, 유이정 씨가 작화를 맡은 『군바리!』라는 만화를 담당하게 됩니다.
 
――이현석 씨의 일본에서의 원작자 데뷔작이군요.
 
이현석 씨: 저는 한국의 만화가 코디네이터도 하고 있어서, 치바 테츠야 상을 받은 이유정 씨라는 선배를 돕거나 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에게 한국의 징병제를 다룬 만화를 제안했는데 「영매거진」에서 기획이 통과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비역일뿐, 실은 군대 경험이 실제로는 없었기 때문에 도중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원작자로서 참가한 겁니다.
 
저의 편집자나 만화 기획자로서의 스승은 유리 씨이고, 저의 만화 인생에 있어서 고단샤 사람들에게 받은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컸습니다.
 
――예를 들면? 
 
이현석 씨: 무수하게 있습니다만,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유리 씨는 일본의 편집자로서 처음으로 대학의 만화연구회를 돌아다니며 인재를 발굴하는 일을 한 분입니다. 그곳에서 여러 재능을 발견했어요. 저는 지금도 「아직 누구도 가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인재를 찾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탄생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해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재능의 발굴・육성을 위해서 강좌나 강연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 미야다이 신지의 곁에서 석사 논문을 쓰고, 『별의 목소리』프로듀서와 함께 스쿠에니로 가다
 
 
――스퀘어 에닉스에서 편집자가 된 경위는?
 
이현석 씨: 지금 말한 것과 병행됩니다만, 일본어 선생님에게 「만화 관련으로 일본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대중문화에 능통한 미야다이 신지 씨라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2003년에 도쿄도립대학에 대학원생으로 입학하여, 일한의 만화 시스템의 비교를 연구 대상으로 몰두하게 되어, 박사 후기 과정을 학점 취득 만기 퇴학할 때까지 7년 간, 미야다이 신지 씨의 곁에서 배웠습니다.
 
본론을 벗어난 얘기가 됩니다만, 간단히 석사 논문의 내용을 말하면, 일한의 편집자 약 30명을 취재하고 깨달은 것은, 일본도 한국도 하나의 잡지에 게재된 작품수는 똑같이 20개인데 한국은 하나의 잡지에 편집장 이외에는 편집자가 2명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가장 편집자가 많은 「소년 매거진」 편집부에는 50명 이상입니다.
 
그럼 일본의 편집자는 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
이 사람들은, 실은 단순히 작품을 만들고 전달하는 걸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나 독자에게 만화에 관한 여러 체계, 시스템을 제공하고, 읽는 법과 그리는 법을 전달하고 있다. 신인 작가를 육성하고, 독자를 육성하고 있다. 그 중개나 프로듀스 기능이, 한국에는 없는 일본 만화 산업의 부유함을 형성하고 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재미있네요.
 
이현석 씨: 그래서, 어느 날은 미야다이 씨와 새로운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 씨로부터 「한국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듣고, 한국 오타쿠 업계의 중진, 편집자, 정부 기관분 등의 코디네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측도 신경 과학의 사이토 다마키 씨나 SF 평론가인 코다니 신리 씨, 만화 평론가인 후지모토 유카리 씨 등, 대규모로 진행된 그 속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별의 목소리』에서 제작 프로듀서를 맡은 H 씨도 있었습니다.
 
H: 저는 졸업을 하고 (구)에닉스에 입사하여,『최유기』를 시작하거나, 만화 편집자로서 경험을 한 후 퇴직했어요. 당시의 망가즈 닷컴, 현재의 코믹스 웨이브 필름에서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의 CD-ROM을 재판매하거나, 『별의 목소리』를 만드는 걸 돕거나 하고 있었습니다. 『별의 목소리』 공개 1년 후, 2003년 3월, 다음 작품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속』의 본격적인 제작이 시작되었을 때 신카이 씨의 곁을 떠났습니다. 이현석 씨와 우연히 만난 것은 딱 그 직후예요. (구)스퀘어와 병합한 옛 보금자리로 돌아가, 다시 만화 일을 할까 생각한 시기였습니다.
 
6월 20일부터 23일에 걸쳐 행해진 히가시 씨의 『파상언론』 한국 투어 당시, 서울의 (홍대)만화 서점에 갔더니, 엄청난 그림의 만화가 잔뜩 놓여져 있어서 저는 미칠 듯이 기뻤어요. 특히 맘에 든 그림의 코믹스를 한 손에 들고 「이현석 씨, 혹시 이 작가 님을 아신다면 소개해 주세요!」라고 말했더니 「아아, 저와 군대에서 함께 했던 사람이에요」라고 말했어요. 그것이 『흑신』이었으며, 작화를 그린 건 박성우 씨였습니다.
 
이현석 씨: 박 씨는 한국의 업계에서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작가였습니다.
 
H: 당시 스쿠에니는 『소년간간』을 졸업한 기존 독자층을 타깃으로 소년지의 다음에 청년지를 만들려고 했었고, 극화적인 것, 섹슈얼한 것을 그릴 수 있는 작가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홍대의 서점에서 대량의 한국 만화를 보고 「이거다!」라며, 이 씨에게 매달렸어요. 제가 만화 편집자로서 옛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이 씨 덕분입니다.
 
 
 
■ 2000년 대에 한국인의 만화가 일본의 만화 잡지에 대두하게 된 배경
 
 
――한국인 작가의 만화가 일본에서 간행된 것은 70년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만, 한국의 만화가가 일본을 타깃으로 오리지널 작품을 그려서 출판된 최초의 예가 88년부터 「모닝」에서 연재된 그림・이대학, 작가・박사열의 『대혈하』입니다。 그 바로 다음 대만 첸웬의 『동주영웅전』이 히트하며 대만만이 아니라 한국의 작가도 기용하는 움직임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껑충 늘어난 것은 2000년 대 이후입니다.
 
지금 LINE 만화의 CCO를 담당하는 윤인완 씨 원작, 양경일 씨 작화로 2001년에는 「선데이 GX」에서 『신암행어사』가 시작됩니다. 한국에서 그려진 만화로 일본에서도 히트한 것은  신서간에서 2006년부터 간행된 박소희 『러브쿄』(드라마『宮(궁) Princess Hours』의 원작)이 있고, 또한 당시 웹툰으로 한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강풀의 『순정만화』가 『순정만화』라는 타이틀로 2005년부터 후타바샤에서 간행되고 있습니다.
 
이현석 씨: 당시 왜 한국 만화가가 일본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걸까. 일본의 만화 잡지 매상은 1996、7년을 정점으로 하락해 갑니다.
그래서 업계내에서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예들 들면 어느 대기업 출판사는 「하나의 100만 부 잡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10만 부의 잡지를 10개 만든다」라는 전략전환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회사에서도 만화 잡지가 점점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쉽게 작가는 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엔터 브레인 (현 KADOKAWA)의 「코믹빔」이 한국에서 「작화의 신」으로 불리는 대거장인 양경일 씨에게 부탁하여, 히라이 카즈마사 원작의 『사령사냥(좀비헌터)』을 그렸던 1998년이, 「한국의 작가를 데려와 일본식 만화를 그리게 한다」는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입니다. 양 씨에 의해 한국 작가의 화력이 증명되어 『신암행어사』가 탄생되었고, 그 인기가 후속 작가・작품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2004년에 창간된 「영간간」의 목표는 「소년지를 읽고 자란 사람들을 위한 청년지를 만든다」였습니다만, 거기에 『시티헌터』나 『북두의 권』『슬램덩크』『AKIRA』의 영향을 받아 「많은 걸 그려넣는 것이 좋은 작화다」라는 사상을 가진 한국 작가가 빠져들었어요. 당시의 일본에서는 많이 그려넣는 것은 부담이 커서 작가로부터 경시되는 분위기도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H: 당시에는 만화의 작화 환경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행해 가는 단경기이기도 했고, 그래서 작가가 한국에 살아도 일본 잡지에 연재하는 것이 가능해졌어요. 아날로그였다면 국제우편으로 보내거나, 물리적으로 시간이 걸리니까요.
 
이현석 씨: 양경일 씨는 『사령사냥(좀비헌터)』 때에는 손으로 그렸기 때문에, 인천 공항에 스태프를 전원 모아놓고 작화하여 원고를 비행기로 보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흐름 속에서 「영간간」의 창간 준비호에 제가 코디네이트한 원작・임달영, 작화・박성우라는 조직으로 『흑신』의 완결이 실립니다만――잡지의 발매 후에 H 씨로부터 「큰 일입니다. 편집부까지 와주세요」라는 전화가 걸려왔어요.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하며 갔더니 「『흑신』의 독자 앙케트......1위입니다」라고 말하셨고 저는 울었습니다.
 
 
 
■ 일본 만화계를 지향하지 않는 한국인 작가가 증가한 배경 
 
 
H: 『 흑신 』은 한국 작가가 그린 만화로서는  일본에서 TV애니메이션화된 첫 작품이기도 했습니다(2009년 방영).
 
이현석 씨: 『 흑신 』의 성공 덕분에 "한국의 작가가 그릴 수 있는 거야? 그가 예외적으로 신적인 작화인 건 아닐까" 라는 일본 만화 업계에 있던 의문이 완전히 불식되었어요. 그 후에도 저는 편집자로서 『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작가·타카시게 히로시, 그림·DOUBLE-S)과 『 FRONT MISSION DOG LIFE&DOG STYLE』(작가·오오타가 키야스오, 그림·C.H.LINE)등을 히트시킬 수 있었고 "영 간간" 에서는 한국 작가의 만화가 기둥 중 하나라고 말해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자부하는 것은 한국인 작가를 계속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데뷔 시키고, 히트를 만들어 낸 것은 "영간간"뿐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본과 한국 만화의 시스템 그리고 작가 양쪽을 이해하고 현장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한 인간이 저 이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타사는 그런 사람을 고용할 의사도 없었어요. 하지만 스쿠에니는 저를 믿고 10년 간 고용했죠. 
 
"영간간" 시대에 얻은 경험과 작가와의 연결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스쿠에니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 ― 그 뒤 2014년에 comico로 옮기면서 처음 웹툰을 했겠네요. 이직한 이유는?  
 
이현석 씨: 2010년쯤 되면, 일본에 오려고 하는 한국 작가가 줄어들었습니다. 왜일까 생각하고 있었더니, 웹툰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걸 알았죠. 
 
동시에 저는 일본 만화 연출에 다양한 문제 의식을 갖기도 했어요. 일본의 만화는 긴 시간을 두고 만화 경계선과 시선 유도의 기술을 축적해 왔어요. 그것을 일본인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은 외국인에게 그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그리려면 더욱 힘들고, 그래서 외국인 작가가 일본식 만화를 그리는 일은 적습니다.  
 
고단샤의 유리 씨와 나란히 저의 또 다른 대스승인 미야다이 씨는 "문화 장르도 진화의 극지까지 가면, 거기에서 퇴화가 시작되고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언젠가 도태 된다." 라고 평소에 말했습니다. 저는 "일본의 만화는 진화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답답함이 있었어요. 
 
그래서 은인인 H 씨가 스퀘어 에닉스에서 출판 부문을 떠나고 머지않아 2013년 일본 최초의 풀컬러 세로 스크롤 만화 앱으로 시작한 comico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 다음해 14년에 전직했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식 만화와 웹툰의 차이점에 큰 충격을 받았고, 엘 세븐에서 작품을 만드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번역기자:soyan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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